개요
여행 일본어가 전부인 사람이 3개 국어 블로그를 발행하는 시대. AI가 기술 블로그의 운영 방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일본어를 못하면서 일본어 블로그를 쓴다
이 블로그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로 운영된다. 그런데 나는 일본어를 못한다. 여행 일본어를 조금 하는 정도다.
며칠 전에 다국어 구현 과정을 정리한 포스트를 발행했다. 발행 후에 일본어 버전을 확인하다가 배경 섹션에서 “日本語もできるので3言語で運営することにした”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일본어도 할 수 있으니 3개 국어로 운영하기로 했다.” AI가 초안을 생성하면서 맥락을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다. 3개 국어로 운영한다는 사실에서 내가 3개 국어를 모두 할 수 있다고 추론해버렸다.
이 에피소드가 AI 시대 블로그 운영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AI는 글을 잘 쓴다. 번역도 잘 한다. 하지만 글쓴이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어떤 언어를 할 수 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그 글을 쓰는지. 이런 것들은 여전히 사람이 확인해야 한다.
그래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여행 일본어가 전부인 내가 지금 일본어 기술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건 불과 1~2년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일이다.
AI가 바꿔놓은 블로그 워크플로
이 블로그의 운영 방식은 전통적인 블로그와 많이 다르다.
포스트를 작성할 때 나는 주제와 방향을 정하고 핵심 내용을 전달한다. AI가 초안을 작성하면 내가 읽고 고치고 다시 요청한다. 완성된 한국어 포스트를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도 AI가 한다. Front Matter 설정, 카테고리 페이지 생성, 네비게이션 메뉴 추가, Git 커밋과 푸시까지 전부 AI가 처리한다.
내가 하는 일은 방향을 잡고 결과를 검수하는 것이다. 편집장에 가깝다. 예전처럼 에디터를 열고 마크다운을 직접 타이핑하고 터미널에서 git 명령어를 치는 방식이 아니다. 대화를 통해 블로그가 만들어진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하나의 주제로 3개 국어 포스트를 작성하고 카테고리 페이지를 만들고 네비게이션을 업데이트하고 배포까지 완료하는 데 과거에는 반나절이 걸렸을 작업이 한두 시간이면 끝난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글을 더 빠르게 더 많은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번역의 품질: 완벽하지 않지만 충분하다
AI 번역은 완벽하지 않다. 아까의 “일본어도 할 수 있으니” 같은 사실 오류가 발생한다. 기술 용어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를 수 있고 문화적 맥락이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기술 블로그에서 이 정도 품질이면 충분하다. 기술 블로그의 핵심 가치는 문학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보의 정확성과 유용성이다. 코드 블록은 언어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설정 파일의 내용은 번역이 필요 없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본어 산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정확한 정보다.
물론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글은 다르다. 문체와 뉘앙스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택의 문제다. 완벽한 번역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한국어로만 발행할 것인가 아니면 90%의 품질로라도 3개 국어로 발행하여 더 많은 독자에게 닿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기술 블로그의 의미는 달라졌는가
AI가 대부분의 기술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시대다. “Jekyll에서 다국어를 어떻게 구현하나요?”라고 AI에게 물어보면 꽤 괜찮은 답변이 나온다. 그렇다면 기술 블로그는 의미가 없어진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더 의미가 있어졌다.
AI는 일반론을 잘 알려준다. 하지만 Jekyll 다국어 구현 과정에서 겪은 “Minimal Mistakes 테마에서 한국어를 기본 언어로 두면서 lang 필드를 비워둘 때 발생하는 Liquid 필터링 문제”같은 구체적이고 맥락이 있는 경험은 실제로 그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다. AI 학습 데이터에 없는 최신 경험, 특정 환경에서의 삽질 기록, 여러 도구를 조합했을 때의 예상치 못한 문제와 해결 과정. 이런 것들이 기술 블로그의 진짜 가치다.
AI 시대의 기술 블로그는 정보 전달자에서 경험 기록자로 역할이 옮겨가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는 AI에게 물어보면 된다. “이것을 실제로 해봤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블로그만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다.
누구나 글로벌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는 시대
1년 전만 해도 3개 국어 블로그를 운영하려면 세 가지 언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사람이거나 번역가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지금은 모국어 하나만 잘하면 된다. AI가 나머지를 해준다.
이건 개인 블로거에게 전례 없는 기회다. 한국어라는 언어 장벽 때문에 국내 독자에게만 닿을 수 있었던 양질의 기술 콘텐츠가 전 세계 독자에게 열린다. 한국의 작은 블로그에서 쓴 Synology VPN 설정 가이드를 일본의 홈서버 덕후가 읽을 수 있다. macOS 개발 환경 설정 글을 영어권 주니어 개발자가 참고할 수 있다.
물론 이 기회는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블로거가 같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경쟁은 글로벌해지고 언어의 보호막은 사라진다. 그래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경험의 고유성이다.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자신만의 환경에서 자신만의 문제를 해결한 기록은 대체할 수 없다. AI가 번역의 장벽을 허물었다면 블로거가 제공해야 하는 것은 번역할 가치가 있는 고유한 경험이다.
블로그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든다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AI 시대의 블로그 운영은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니라 시스템을 구축하는 행위에 가깝다.
다국어 URL 구조를 설계하고 Liquid 필터링 패턴을 만들고 언어 전환 로직을 구현하고 SEO hreflang 태그를 자동화하고 AI와의 협업 워크플로를 정립한다. 이 모든 것이 한번 구축되면 이후의 포스트 발행은 극적으로 단순해진다. 주제를 정하고 내용을 정리하면 나머지는 시스템이 처리한다.
이건 과거의 블로그 운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전에는 매번 글을 쓰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금은 글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배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 되었다. 반복되는 작업을 자동화하고 AI가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사람이 집중해야 할 부분을 날카롭게 좁히는 것. 이것이 AI 시대 블로그 운영의 본질이다.
결국 사람의 경험이 남는다
AI가 글을 쓰고 번역하고 배포를 도와준다. 하지만 그 글의 출발점은 여전히 사람의 경험이다.
Synology에 VPN 서버를 구축하면서 겪은 삽질은 내가 직접 한 것이다. Jekyll에서 다국어를 구현하면서 발견한 Liquid 변수 스코프 문제는 내가 직접 부딪힌 것이다. “일본어도 할 수 있으니”라고 적힌 문장을 발견하고 “아 이거 아닌데”라고 깨달은 것도 나다.
AI는 도구다. 강력한 도구다. 하지만 그 도구로 무엇을 만드느냐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기술 블로그가 AI 시대에도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경험을 기록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AI가 쓴 글이 아니라 AI와 함께 만든 경험의 기록. 그것이 이 블로그가 지향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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